소풍, 그 아련한 추억
소풍, 그 아련한 추억
나는 충북 괴산에서 딸부잣집의 쉰둥이 4대 독자로 태어났다.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래도 초중고 12년 동안 한국전쟁 때도 지각·결석을 하지 않았다. 소풍 가는 날이면 조퇴가 몇 번 있어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소풍이라야 느티울(괴강)이거나 홍명희(洪命熹) 선생이 우수에 잠겼다던 제월대(霽月臺),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행한 군자산의 옛 사찰이거나 수안보(水安堡) 온천이 전부였다.
물가로 소풍을 가는 날이면 나는 시름에 젖었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외아들이 어디 물가를…” 가까운 수안보도 절대 안 된다, 온천의 뜨거운 물은 용이 토하는 것인데 그 용은 특히 외아들만을 노리며, 윤년이면 독성이 더욱 심하다고 한다. 『토정비결』 철이면 “5월에 물가에 가지 말라”는 대목을 보여주시면서 다짐했다. 모처럼 수학여행을 허락받은 날, 학교에 가서 여행 가는 줄에 서면 친구가 안 가는 쪽 줄을 가리키며 “넌 저쪽 줄이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 3학년 때가 되어 바다를 보았고, 40세가 되어 교수연수회 때 처음 수안보에 합숙해 보았다. 서더리 탕이 물고기 이름인 줄 알았다가 여태 놀림감이 되고 있다.
그렇게 보낸 유소년기의 삶은 나에게 깊은 내상(內傷)을 주었다. 유기불안(遺棄不安)과 분리불안(分離不安)이라고 하는 특이한 정신과 질환이다. 아버지와 다툰 뒤면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만 같은 불안에 자다가도 엄마 품에 파고들었다. 성인이 되니 사람 모이는 곳이 두려워 공황장애와 강단공포증으로 고생했다. 단체여행을 떠났는데 모두 짐을 싸 돌아가지만 나만 가방을 못 찾고 허둥대다가 일행에서 떨어지는 꿈을 지금도 꾼다.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두려웠다. 강의안을 두 번 읽고 들어갔으나 강의실이 너무 무서웠다. 강단이 높은 계단강의실일 때는 더욱 그랬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랬다. 내 일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중년 시절부터 방학이 되면 천주교 신자인 나는 30년 동안 전국의 사찰여행을 하며 민박한 추억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요한 산사에서 별빛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고, 새벽 범종 소리와 스님의 『반야심경』 독송(讀誦)을 듣는 것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대학에 자리 잡고 보니 싫으나 좋으나 수학여행을 따라갈 일이 생겼다. 지도 교수로서 한 말씀 하는 일과 학생들의 과음 방지와 안전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책임 업무였다. 어느 해인가 2박 코스로 지방을 내려갔는데 한 여학생의 뒤에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신지요?” “엄마예요.” “엄마가 왜?” “우리 아이는 엄마가 지어주는 밥이 아니면 먹지 않아요. 잠도 재워줘야 해요.” 그러고 독방을 얻어 함께 자고 먹었다. 너무 기가 막혀, 뒤에 저 학생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까 걱정했더니, “돈 많으면 그런 남편 만나 잘 살아요”라고 대답했다. 저 애도 나처럼 살면 안 되는데….
어느 날 고등학생인 아들이 어딜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어딜 가는데?” “공수부대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실시하는 고공낙하 훈련에 참여하려고요.” 우리 어머니가 들으셨으면 기절초풍할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담담했고, 내 자식이 대견했다. 그는 이미 품 안의 자식이 아니었고 나 같지 않았다. 걱정 한마디 하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만 했다. 저 녀석이 5대 독자인데…. 훈련을 마치고 새까만 얼굴로 집안을 들어서는 아들이 그리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해인가 아들이 말했다. “2000달러만 주세요.” “어디 쓸려고?” “미국 대륙 횡단을 하고 싶어요?” 언제 갈려는지, 어떻게 가려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2000달러를 주었다. 떠나는 날, 문 앞에서 잘 다녀오라고만 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새삼 초중등학교의 수학여행 문제가 논란의 주제로 떠올랐다. 문제의 핵심을 알겠다. 자식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과 안전 문제로 시달리기 싫은 인솔 교사의 기피 심리가 여기까지 왔다. 양쪽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문제는 엄마들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보내야 한다. 교사의 책임은 운전기사의 음주, 과속, 불법 차선만 살피면 된다. 학생의 안전 문제는 일단 본인의 책임이다. 교사는 어린아이들이 너무 많이 마시지 않고, 몸싸움이나 하지 않도록 말리면 된다.
엄마 마음에는 자식이 늘 안쓰럽고 걱정스럽겠지만, 그들은 이미 애들이 아니다. 알 것을 다 안다. 그들이 아직도 어리게 보이는 것은 엄마 마음뿐이다. 다 저 살 궁리하고 있고, 우리 시절보다 더 영악하다. 그들에게 자연을 돌려주자느니, 루소의 교육이 어쩌고, 거창한 얘기할 것 없다. 입시 지옥과 컴퓨터 게임에 찌들고 저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에게 푸른 하늘에 길 없는 길도 잘 날아가는 철새와 물속에서 퍼덕이는 물고기를 보여주고, 개구리와 메뚜기는 어떻게 사는지, 모처럼 객지의 잠자리에서 부모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고, 할아버지가 먹고살았다는 칡과 진달래의 맛은 어떤지, 우리가 밟고 살던 땅은 아스팔트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줌으로써, 메마르고 굳어 질식할 것만 같은 저들의 삶에 숨통을 열어주어야 한다. 시골 외갓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던 이야기인 영화 ‘집으로…’가 왜 그리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가?< 신복룡, "소풍, 그 아련한 추억", 중앙선데이, 2026.5.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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