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향약이 오늘날의 ‘지방자치’에 던지는 경고
조선의 향약이 오늘날의 ‘지방자치’에 던지는 경고
향약(鄕約)은 한 고을의 약속을 뜻하는 자치 규약 성리학적 이상향과 이상적 지역 공동체 구현 목표 교묘한 처벌과 백성 동원 등 양반의 지배 수단되기도 일각선 지배층의 기득권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변질 현대의 지방자치 역시 시민 감시 절실한 시점
<향약의 4대 덕목>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된 일은 서로 타이르고 고쳐준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서로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킨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근심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다.
《주자증손여씨향약》에 구결을 달고 한글 번역을 덧붙여 1574년 간행한 언해본. 북송 남전현에 거주하던 여씨 4형제(대충, 대방, 대균, 대임)가 향약을 처음 실시해, 여씨향약으로 일컫는다. 국립한글박물관
위의 조목은 향약의 4대 강령이다. 향약은 말 그대로 한 고을의 약속을 뜻하는 자치 규약이다. 4대 강령처럼 향약의 목적은 국가의 법률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와 상호 책임 아래 이상적인 지역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다.
조선시대 향약 시행에 앞장선 계층은 양반이다. 성리학은 양반 계층에게 ‘학문’에 그치지 않았다. 성리학은 그들에게 내면과 외부를 이해하는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양반 계층은 자신들의 터전에서 성리학으로 일군 이상향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 방안 중 하나가 향약의 시행이었다.,특히 조선 사회는 주자를 존숭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따라서 향약은 주자 성리학의 실천이라는 큰 명분을 가졌다. 우리나라 성리학 계보의 양대 축을 구성하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각각 향약을 제정하였고, 그들의 학맥을 계승한 후학들도 이를 본받아 자신들의 터전에서 시행해 나갔다.
1556년(명종 11)에 퇴계 이황이 안동 예안에서 향약을 시행하기 위해 여씨향약을 본떠 작성한 서문. 퇴계 이황의 향약은 후대에 여러 지역 공동체 향약의 전범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향약은 중국에서 유래하였지만, 이 땅의 양반들은 공동체의 실정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 시행했다. 지방관이 직접 향약 시행을 지시하거나, 양반 계층이 수령의 협조를 받아 고을 및 면리(面里)에서 시행하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는 지역 공동체 자생의 계(契)와 향약을 접목했다. 서원·서당의 공부 모임인 강회에서는 향약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선비들이 함께 그 조목을 낭독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정부도 민심 안정과 풍속 교화의 매개체로서 향약에 주목해, 여러 차례 교시를 내려 그 시행을 권장했다. 그런데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향의 실현과는 별개로 지배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양반들은 향약을 통해 지역 공동체 내에서 지배층으로서 권력을 강화했다. 만약, 양반이 드러내놓고 지역 공동체를 통제하고 특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토호 세력의 전횡으로 인식될 터였다. 이에 따라 지방 관아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양반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향약을 시행하면서 양반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적극 반영하였다.
1884년에 제정한 곤양군 향약 문서. 한문 조목을 앞에 작성하고, 뒤쪽에 해당 조목을 작성한 사유와 내용을 한글로 적었다. 국립한글박물관
‘과실상규’는 공동체 내에서 자의적 처벌의 명분으로 기능했다. 지역 공동체마다 처벌 수위는 달랐지만, 구성원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양반들은 향약에 근거해 벌을 주었다. 예컨대, 향약 모임에서 죄를 꾸짖는 ‘면책’, 반성의 의미로 음식으로서 대접하는 ‘제마수’, 일종의 자격 정지인 ‘손도’, 이웃과 교류를 끊는 ‘불통수화’, 마을에서 쫓아내는 ‘출향’은 향약을 어긴 데 따른 대표적 처벌이었다.
‘예속상교’의 ‘예’는 신분 질서도 포함했다. 당시 지역 공동체에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각종 계가 많았다. 백성이 운영한다고 하여 이를 ‘하계’라고 일컬었으며, 대표적으로 농삿일에 인력을 협동 운영하는 ‘두레’가 있다. 양반 계층은 향약을 운영하면서, 두레를 하부 조항에 편제해 직접 통제했다.
1797년 향약과 향례 등을 종합하여 간행한 책. 정조는 전국에 향약 시행을 권장하기 위해 《향례합편》을 간행 및 보급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또 ‘환난상휼’을 시행하려면 인적·물적 자원이 필요했다. 취지는 상부상조에 있었으나, ‘환난상휼’은 기금을 모으거나, 대금업을 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바로, 재난을 대비해 미리 자금을 확보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신분 간 질서가 강한 향약 조직에서는 구성원의 상장례 때 상여를 매거나 무덤을 파는 각종 일에 환난상휼을 명분으로 백성을 동원했다.
아마 조선시대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향약이 널리 시행된 시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전후일 것이다. 당시 정부는 농민군의 확산을 막고자 지방관에게 향약 시행을 지시했으며, 양반 계층은 향약 조직으로서 의병을 구성하여 동학도를 방어했다. 전쟁이 끝난 후 향약의 참여 여부로서, 잔존 동학도를 색출하는 지역 공동체도 나타났다.
1828년 전라남원의 우와대동(牛臥臺洞)의 향약인 동약(洞約)과 향례 규정, 조목을 기록한 책.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향약을 시행했던 지식인들은 주자 성리학의 실천과 이상적인 지역 공동체의 구현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분 질서와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려던 현실적 목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공동체의 자발적, 주체적 운영을 표방하던 향약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지배층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향약의 또 다른 실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의 지방자치 역시 주민의 복리 증진이라는 명분 아래 지방 의원의 특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지, 시민의 감시와 깨어있는 의식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15)<이광우 영남대 연구교수, 조선생활실록(實LOG)입력, 202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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