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필요한 안데스 정신

신상구 | 2026.09.15 13:13 | 조회 36


                                                                다시 필요한 안데스 정신

   안데스산맥 기슭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공장이 있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소도시 살타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40분간 설산을 지나가면 끝 모를 황무지가 나타난다. 해발 4000m 고지대에 있는 옴브레 무에르토 염호(鹽湖)다. 한 달 전 찾은 염호에선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산소량이 희박해 조금만 걸어도 어지러웠다. 영하 15도였지만 햇빛은 따가웠다. 이곳 일사량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많다. 포스코그룹은 여기에서 지하 염수를 끌어올려 증발시킨 후 배터리용 수산화리튬을 만들고 있다.

  철강 기업인 포스코가 해외 자원 개발에 나선 배경엔 자원 안보, 중국산 공세 등이 있다. 역대 회장들은 투자 결정을 내렸고, 근로자들은 맨땅을 일궜다. 처음엔 물도, 전기도 없었다. 담수는 40㎞ 떨어진 곳에서 끌어왔다. 비포장도로 380㎞를 왕복 16시간씩 오가면서 모든 자재를 고지대로 날랐다. 칼바람은 매서워 시속 100㎞를 넘으면 작업을 중단하곤 했다. 간이공항이 생겼지만 변덕스러운 고산기후 때문에 결항되기 일쑤였다. 근로자 2000여 명은 고산병 탓에 1∼2주씩 교대 근무하면서 공장을 세웠다. 조기선 포스코아르헨티나 안전부장은 “텅 빈 땅에 공장을 건설하는데 아르헨티나 근로자들은 견디질 못했다”며 “포항과 광양 뻘밭에 제철소를 지었던 경험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불모지에서 땀 흘린 노동은 경제·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다. 확보된 광권은 서울 절반 면적과 맞먹는다. 매장된 리튬은 시세로 400조 원 규모다. 현지에선 약 2600명을 고용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 제조업 본질이기도 하다. 근간엔 기업가정신이 있다. 돈도, 기술도, 자원도 없이 창업에 도전해 국부를 키운 저력이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산업의 태동이 그랬다.

  최근 한국 제조업은 예전 같지 않다. 호황을 누리는 업종은 사실상 반도체가 유일하다. 한국 기업이 일본을 추격하다가 어느 순간 추월했듯이 중국에 하나둘 밀리고 있다. 국내 재계 순위는 수십 년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착화한 서열을 뒤흔들 만한 신산업이 없었단 얘기다. 경영권을 승계한 일부 오너 3∼4세들은 새로운 사업보다 안전하게 자산을 불릴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있다.

  제조업이 먼저 쇠퇴한 유럽은 어떨까. 영국은 제조업이 무너지자 중산층이 사라졌다. 1970년대 이후 영국 경제는 금융 중심으로 재편됐다.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던 제조업이 붕괴하자 양극화는 심해졌다. 산업 구조가 금융·서비스업 위주로 바뀌면서 고임금 전문직과 저임금 서비스직만 늘어난 것이다. 영국은 껍데기만 선진국이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주력인 철강과 자동차 산업이 침체된 독일에선 수많은 국민이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유럽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이다. 생산성이 뒤처지는 산업에서 미래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가장 가난한 나라가 전 세계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원천엔 기업가정신이 있었다. 경제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전장에서 기업의 손발을 묶고 있는 온갖 규제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격변하는 산업 전환기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도태될 뿐이다.<권도경, " 다시 필요한 안데스 정신", 문화일보, 2026.9.14일자.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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