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 글씨를 남긴다
아! 가을, 글씨를 남긴다
서울 북촌 정독도서관 ‘노벨문학라운지’ 입구에 새겨진,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의 말.
새털구름에 수줍은 듯 걸렸다가 금세 사라지는 가을 무지개, 아침저녁으로 산어귀에서 선선하게 불어오는 건들바람, 낮고 부드러운 햇빛이 건물을 어루만지며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 열차 차창 밖으로 출렁이는 벼들의 황금빛 융단, 정수리에 톡 하고 떨어지며 가을 인사를 건네는 노란 은행알, 녹색 도토리 갈색 도토리가 형과 아우처럼 한 가지 끝에 사이좋게 달린 갈참나무 열매, 낮과 밤의 경계에 붉은 유화물감을 휘젓듯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의 퍼레이드. 아, 가을엔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질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늘은 좋아하는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려 본다. 복도에 사람들이 각자 고른 구절을 필사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손금이 다르듯이 글씨체도 제각각이라 수십 장 종이에 똑같은 필체가 하나도 없다. 울퉁불퉁한 것, 가느다란 것, 휘어진 것, 또박또박한 것, 저마다 개성이 있어 귀엽다.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저 자기 글씨체로 글을 썼을 뿐인데 이토록 아름답다니. 어쩌면 우리는 원래 가진 소중한 걸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인공지능의 속도와 기세에 눌려 진짜 중요한 ‘나 자신의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복도를 나오자 “책이여,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서울 북촌 정독도서관 ‘노벨문학라운지’ 입구에 새겨진,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의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 역대 수상작과 세계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작품들을 한눈에 죽 둘러본다. 안쪽에 마련된 아늑한 서재에서는 ‘한강 작품 이어 쓰기’가 상시 진행 중이다. 앞서간 사람들의 다채로운 글씨체로 두툼한 공책들이 여러 권. 그냥 펼쳐 보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인쇄된 출판물과는 또 달리, 누군가의 육필에서 전해지는 힘과 개성에 압도된다. 나도 이어서 한두 페이지 끄적인다. 풀잎에 앉은 작은 벌레처럼 후 불면 날아갈 듯한 글씨체로, 오직 하나뿐인 필적을 남기며 가을 오후 한때를 보냈다.<장수윤, “아! 가을, 글씨를 남긴다”, 조선일보, 2026.9.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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