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돌 한글’의 자랑과 우리의 부끄러움

신상구 | 2026.10.14 02:01 | 조회 29


                                     ‘580돌 한글’의 자랑과 우리의 부끄러움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가 홀로섬의 특별한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꾸고 지키는 데에 온 힘을 바친 우리의 큰 스승이다. 주시경 선생의 업적은 학문에만 그치지 않고 토박이말을 살려 쓰고, 글쓰기에서 한글만 쓰기도 실천했다. 그리고 우리 글자 이름을 ‘한글’이라 정했다. 올해는 선생이 태어나신 지 150돌이다. 그래서 올해 맞이하는 한글날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감회가 각별하다.

  모든 백성이 글자 생활을 누리도록 세종대왕이 배우기 쉽게 창제한 한글이 세계 학계에 알려졌을 때, 창제 원리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즉, 기본글자를 먼저 만들고 그것을 조합하여 다른 글자들을 생성해 가는 방법은 현대 과학과 수학의 생성 원리와 일치했다. 이처럼 한글이 말소리를 내는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기본글자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자를 확장해 나가는 원리는 인류 사회에서 지금껏 없었던 일로, 세계 언어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20세기 말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던 때, 좁은 자판에 한글의 창제 원리를 적용하니 다른 어떤 글자보다 입력이 빨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바로 한글 창제 원리의 과학성 덕분이다. 그러나 한글의 장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최첨단 인공지능(AI) 시대에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한글의 구조적 특성으로, 정보 처리와 인공지능 개발에 매우 적절하다는 점이 꼽힌다. 한글은 자모 단위, 음절 단위, 형태소 단위로 자유롭게 분해와 분석을 할 수 있어,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처음 보는 단어는 말할 것도 없이 복잡한 문장을 신속하고 정밀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말소리와 글자 사이의 대응이 규칙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한글은 각 글자 형태가 발음 정보를 체계적으로 담고 있어, 인공지능의 핵심 기술인 ‘글자→발음→음성변환·음성인식·음성합성’과 직결된다. 영어 알파벳의 불규칙한 발음과 비교하면 한글은 자모 단위가 명확하고, 중국어 한자처럼 수만 개의 글자를 직접 다뤄야 하는 방식과는 구조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글자인데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한글은 무참히 홀대받고 있다. 더욱이 올해 한글 주간의 표어가 ‘내 곁에 한글’인데도, 길거리를 걸어가면 내 곁에 있는 간판과 광고판에 한글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로마자·일본글자·한자가 자리를 잡고 있어 안타까움을 넘어 부끄러울 뿐이다.

  양식이든 한식이든 식당 출입문에 ‘OPEN’이란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업 중’처럼 한글로 표기하면 음식 맛이 떨어진다고 생각할까? 식당 안에는 ‘ORDER’(주문), ‘PICK UP’(포장) ‘RETURN’(퇴식)이 보인다. 아예 내 곁에 한글은 없다. 오후에 ‘준비 중’이라고 한글을 써 붙인 식당도 있지만 대부분 ‘Break Time’이라고 썼다. 어느 대학이 도서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현관에 큼직하게 ‘Early ComeBack OPEN New Library’라고 붙여 두었다. 한글 표기로 ‘도서관 새 단장 개관’이라고 쓰면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우리가 말로만 한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널리 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글날 가슴 벅차게 부르는 ‘한글날 노래’를 작사한 최현배 선생은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민주의 근본,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라고 말씀하셨다. 580돌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모두가 새겨야 할 교훈이다.<권재일, “‘580돌 한글’의 자랑과 우리의 부끄러움”, 문화일보, 2026.10.2일자.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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