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상제님께 돌아가야 한다

초립쓴30대 | 2009.10.18 15:38 | 조회 1588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도장이라면 희망은 있다

김은정(33세)/ 서울 목동도장 2구역 포감/ 도기 125년 9월16일 입도

 
 예전의 화곡도장이 목동도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출발한 지도 어언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집이 경기도 일산이라 거리가 멀어 목동도장에 잠시만 있어야지 한 것이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종교는 하나로 귀결될 텐데, 왜들 싸울까?
 뒤돌아보니 상제님 신앙을 시작하고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처럼 입도할 때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교 때부터 지구가 언젠가는 끝장이 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장난처럼 ‘내 소원은 지구의 종말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해 여러 가지 갈등을 하다가 혼자서 결론을 내리기를,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로 귀결될 것 같은데 왜들 그렇게 싸울까. 만약 모든 종교를 통일하는 분이 나온다면 그분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분일 것이다. 그런 진리가 나온다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에게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말해주지 않고, 혼자 방에 들어가 쌀에다 향을 꽂아놓고 물을 떠놓고 뭔가를 했습니다. 가족들은 조금 황당해 하면서도 오빠의 행동에 재미있어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빠가 저에게 도장이라는 데를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산도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저 신명 이야기라든지, 사람이 많이 죽는 일이 생긴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조상님의 도움이 있었는지 저는 순순히 오빠를 따라 나섰습니다.
 
 오빠를 따라간 노량진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순수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도전에 나온 상제님도 그냥 좋아졌습니다. 상제님이 사투리를 쓰시는 게 정겹고 신기했습니다.
 
 입도를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수행하면 좋다길래 회사 끝나고 도장 들려서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결혼과 함께 닥친 IMF로 밥만 해댄 세월
 순순히 입도는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입도할 당시, 지금의 남편과 3년 정도 사귄 상태였는데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당시 학생 신분에다 군대도 안 갔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공과목이 사학과라고 사회에서 비젼이 안 보인다, 뭐 먹고 사냐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냥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가 증산도에 입도하고 약 1주일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부모님께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남편이 12월에 입대할 예정이었는데, 결혼 날짜를 잡자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뭔지 황당하기는 했지만, ‘때는 이때다’하고 우리들은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날을 잡았습니다.
 
 결국 저는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시댁 근처에 살게 되었기에 도장을 옮겼습니다. 속으로는 시댁 식구들을 개벽기때 다 살려야지, 전부 한 30명 되니까 육임은 짜고도 남겠다 하면서….
 
 그러나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장에 제대로 적응이 안 되었습니다. 신앙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공교롭게 아이까지 가지게 되니, 저는 시댁 일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서히 도장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상제님과 태을주는 늘 가슴 속에서 맴돌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기만 했습니다.
 
 IMF를 맞이하면서 시댁은 점점 기울어갔고 시부모님, 시할머니, 할아버지, 형님네까지 한 건물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에서처럼). 모두들 돈 벌러 나가버리고 나면 집안일은 모두 제 차지였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부도나서 와 계시던 작은아버님을 포함하여, 온 식구들의 식사를 제가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제대하고 석사논문 쓴다고 제게는 신경도 안 썼습니다. 저는 이제 겨우 기어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일년 정도 그렇게 밥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도장에 나간다 하더라도, 식사때만 되면 저를 찾으시니까 부리나케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남편의 눈총을 받으면서, 겨우 성금만 내는 정도였습니다.

나는 다시 상제님께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 제가 무슨 정신으로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장에 다시 나가야 하는데, 나는 태을주의 체험과 상제님을 잊을 수 없다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소속도장이던 자양도장의 이성우 성도님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꾸준히 도장소식을 전해주고 도장과의 맥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펴 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일침, “그러다가 상생신도 되십니다”하는 말을 듣고, 왜 그런지 그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돼! 나의 인생은 여기가 종점이 아니야, 벗어나야 해…!’
 
 시댁에 묻혀 살면서도 청수는 꾸준히 모셨고 마음 속으로 태을주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다시 상제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졌습니다.
 
 당시 우리는 수입이 없어 시댁에서 더부살이 하는 처지라 독립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무조건 상제님께 빌었습니다. 방 한켠에 청수 모시고 문 잠궈놓고 배례를 하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려면 수입이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제가 아무 직장이나 취직을 했고 시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내놓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오직 나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했습니다.
 
 드디어 두달 뒤, 떠나기 싫어하는 남편을 달래가며 금천구 시흥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가 1998년도. 마침 그때는 태사부님 사부님께서 직접 전국을 다니시면서 순방도훈을 시작하실 즈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인 게, 태사부님 사부님의 친정(親政)에 발맞추어 저도 그 물결에 합류할 수 있도록, 작은 자유를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서울지역 순방도훈에 참석했던 날, 태사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내 울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절로 납니다. 내내 집에만 갇혀 살다가, 시댁에서 독립하여 밥순이가 아닌 상제님의 일꾼으로 다시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 저는 도장에서도 울었고 증대교육 가서도 남모르게 내내 울었습니다.
 
 상제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상제님, 이제는 제가 교육관을 지키는 낙락장송처럼, 증산도를 지키는 굳센 아줌마가 되겠습니다…’
 
 
 도장에 매달리니 만사가 저절로 풀려
 이사한 후 시흥도장으로 옮겨 왔습니다. 다행히 도장이 가까워서 날마다 도장에 나가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도장 살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상제님 일을 하겠다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상주하시던 분들이 매일 라면에 김치만 먹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개개인의 어려움은 접어둔다 해도 저러다가 골병 들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의 반찬을 하나씩 하나씩 나르게 되었고, 결국은 저도 도장에 와야만 먹을 게 있을 정도로 도장 일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수호사가 되신 배희숙 성도님과 당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부족했던 신앙의식을 키워 나가고 도장도 성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흥도장은 화곡도장과 더불어 전국에서 제일 작은 도장이었는데, 이래서야 의통집행을 할까 싶어서 일단 도장을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도장에 가서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남편이 신앙을 반대하고 있었고, 경제력도 특별한 능력도 없었지만 그저 기도를 하고 배례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여를 기도하던 중, 박완선 포정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면서 모든 일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박포정님도 도장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셨던지, 잠자던 신도들을 모두 깨우고 도장 이전할 채비를 하셨습니다. 결국 시흥도장은 더 넓고 좋은 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제가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는 소원을 성취한 셈입니다.
 
 도장 공사가 끝나갈 무렵 한가지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작은아버님 중 한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다고 일산집에 들어와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처분할 수가 없으니 전세값을 싸게 해줄 테니까 관리를 하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무기한으로. 당시 집문제가 좀 불안했던 터라 그 말씀이 반갑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도장을 이전했는데, 다시 이사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중, 박포정님의 한마디에 저는 일산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산에 도장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전지구 어느 곳이든 증산도인과 증산도 도장이 없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손 쥐고 대책 없이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일산에 도장을 개창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일산에 들어오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어디론가 소속 도장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기한 일은, 이 일이 있기 몇달 전 친정어머님께서 갑자기 돈을 주시면서 운전면허를 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일산으로 들어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뜬금없이 면허를 따라고 돈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내 돈 들어가는 것 아니니 따고 보자… 하는 심사로 운전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 일산으로 이사오고 나니 작은아버님께서 차까지 주시는 바람에 곧바로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온몸을 던져 이룩한 목동도장 개창
 이즈음 박포정님이 화곡도장으로 발령 나셨습니다. 일산에서 시흥도장은 너무 멀고, 또 화곡도장에 사람이 별로 없다길래 막일이라도 도울까 싶어서 도장을 옮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봄, 영등포도장 한켠에서 박완선 포정님, 박영숙 성도님, 신숙희 성도님, 저 이렇게 네 명의 신도가 화곡도장을 살리자고 모여 앉았습니다. 당시 화곡도장은 기존의 도장을 철수하고, 살림살이를 잠시 영등포도장에 의탁하고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장을 옮기긴 옮겨야겠는데, 화곡도장 신도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타 도장에서 전입온 신도들만 모여앉아 이 궁리 저 궁리를 했습니다. 신도들 대부분이 관리신도이고, 그나마 나오는 한두 명은 신입신도라서 이전성금부터 시작해서 공사를 진행하는 문제까지 산넘어 산이었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좋은 자리를 구하기 위해 두 달을 넘게 강서구, 양천구 일대를 뒤지고, 일일이 답사해보고, 겨우 자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그러나 공사비용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했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밥하던 사람이 다리미질(신단공사의 한 과정)도 하고, 설거지하다가 페인트 칠하는 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사람이 없으니까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막일이라도 단 한 사람의 손길이 아쉬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밑천은 ‘정성’이라는 태사부님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 신도들의 정성 덕택에 목동도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땅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던 많은 상황들이 어느 순간엔가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목동도장도 새 역사를 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두 사람 빠지면 분향명촉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상황. 도정 집행하면서 참으로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가장 많이 느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사람이 있다면 뭐라도 하겠는데….
 
 여건도 어렵고 사람도 없을 때에는 그야말로 참으로 답답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도장에서 딱히 맡은 일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행동이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도장에 계속 있어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그 사람이 도장에 와서 하는 행동, 말들이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도장이라면 희망은 있다
 목동도장에서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적극적인 아줌마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줌마들을 따뜻하게 배려해 주셨던 포정님이 계셨습니다.
 
 여성신도들, 특히 아줌마 신도들이 많다는 것이 목동도장의 큰 특징입니다. 여성신도들이 남자신도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치성 끝나고 어떤 때 보면 포정님 빼고 전부 여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꼬마들까지!
 
 여성신도들은 사실 남자들처럼 처음부터 일을 헤치고 나가는 힘은 약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여성신도들은 따뜻하고 부지런합니다. 특히 결혼을 한 신도들은 시집살이나 육아 등을 통해 희생정신을 몸으로 배웠고,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닦여진 심성이 있어서 사람을 편하게 해줍니다.
 
 단점이 있다면 활동력이 약하고(육아나 가정적인 문제로) 남편에게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동도장에도 그런 신도들이 있습니다. 남편이나 시댁의 신앙반대로 전쟁을 치루는 기분으로 신앙을 하는 신도들 말입니다.
 
 저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신앙했기 때문에, 그런 여성신도들에게 더욱더 관심이 갑니다. 남편이나 아이 문제로 괴로워하는 신도들을 보면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곤 합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신앙을 그만두게 하지는 않겠다, 끝까지 챙기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도정 집행하는 측면에서 보면 아이 딸리고 집안 반대로 힘겨워 하는 신도들을 챙긴다는 게 솔직히 힘들고, 실속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여성신도들은 사실 치성에 제대로 참석하기도 힘들고 포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신도들의 잠재력을 믿습니다. 제가 그러했고 저희 도장의 많은 여성신도들이 그러하듯, 그런 신도들이 의식의 자유를 얻어 정신적인 독립만 한다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일 수 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인내력도 훈련했고 육아과정에서 모성애도 키워졌기에, 도장에 애정을 갖기 시작하면 집안의 쌀과 반찬을 나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목동도장이 땅 속에서 힘겹게 지표면을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여성신도들의 정성이 밑바탕을 이루었이루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성신도들도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부엌을 따뜻하게 도장을 아늑하게 만든 정성을 말합니다.
 
 목동도장은 쉬는 시간이라도 되면 부엌이 가장 북적거립니다. 무얼 먹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얼굴보고 대화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입니다. 만일 며칠 만에 만났다면, 어디가 아팠다부터 시작해서 무슨 체험을 했고 포교하려고 누구를 만났는데 기분이 어땠다는 등 서로 쏟아내기 바쁩니다. 아줌마들의 도담에 처녀 총각이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고, 남자라고 해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면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도장입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도장에 있고, 외로울 때 차 한잔 같이 기울일 사람들도 도장에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도생들
 상제님 신앙이 해를 거듭할수록 세상 사람들과 의식의 편차가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부모형제, 남편이라도 상제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점점 마음을 나누기 어려워지고 외로워집니다.
 
 후천 오만년 동안 신명이 되어서라도 함께할 사람들이라는 이유를 떠나서라도, 의통집행시 함께 할 팀이라는 이유를 떠나서라도, 오직 마음을 함께 나누는 도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도장 신도들에게 잘해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상제님 태모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뜻함과 인간미 넘치는 도장! 저는 그런 도장이 당장은 성과가 없어도 결국은 상제님 일을 이루어낸다고 믿습니다. 포정님께서 ‘느려도 소걸음’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화합이 잘된다면 한사람의 한 발자국이라도 소걸음이 되겠지요.
 
 계미년 올해는 모든 도장에 화기가 무르녹고, 상제님의 모든 일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심신앙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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