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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별을 향해 가는 것, 오직 그것뿐! - 마르틴 하이데거

2023.10.20 | 조회 1142 | 공감 0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1️⃣ “주시하는 자”


수사학修辭學 교수인 발터 옌스(Walter Jens)는 그를 일러 “알레만니의 소크라테스”라 하였다. [‘알레만니’는 고대 게르만 부족 연맹체의 이름이었으나 흔히 독일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는 심지어 “주시하는 자(einer Sehende)”라고 불렀다.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보다 더 위대한 고지자告知者의 예비 사유자일 뿐이라고 여겼다. 물론 위대한 고지자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제까지의 얘기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76년 5월 26일 프라이부르크에서 그가 사망하자, 독일의 대표적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에게는) 세계 철학사의 전 학식이 응집돼 있다. …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은 독자들을, 이제껏 철학 문헌들이 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깊숙한 물음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미 하이데거가 살아있을 당시 프랑스의 르몽드紙가 그보다 훨씬 높이 추켜세웠다. 이 신문은 슈바르츠발트 출신의 교수를 단적으로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꼽음으로써, 그를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또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같은 뛰어난 사상가들보다 앞자리에 세웠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의 비상한 위대함은 전통 서양철학의 주요한 근본의문들, 예를 들면 존재, 세계, 시간이나 진리와 논리학에 대한 물음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제기했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일은 금세기[20세기]의 어떤 철학자에게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그런 이유로 (스승의) 사유에 의해 일고 있는 질풍에 관해 얘기한다. 그녀에게 그 같은 돌풍이란 단지 플라톤의 작품들에서나 불어올 수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철학자는 한 가지 단순한 물음을 가지고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평생 동안 그가 매달린 물음이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존재론)은 “존재자”와 “존재”를 구별한다.


이에 따르면,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최고 존재자로서의-신 등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자이다. 그에 비해 존재란 존재자인 사물들, 사람들, 신을 그것들이 그것인바 그것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전통존재론에서는 충분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존재와 존재자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r Differrenz)”란 유명한 말은 그에게서 나온 말이다.


수천 년 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무”란 말과 마찬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란 매혹적인 말에 몰두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존재의 의미를 캐묻는 일을 했다. 무엇보다도 『존재와 시간』에서 그렇게 했다. 이 책은 당시 38세의 교수인 그를 일약 대학 밖에까지 유명하게 만들다.




전문가들이 『존재와 시간』을 금세기에 쓰인 저작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면서 책의 중요성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견준다. 또한 젊은 물리학자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가 30대 후반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를 접하며 언급했던 다음의 말 역시 의심의 여지없이 이 작품에도 해당된다.

“이것이 철학이다.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이다.”


실제로 『존재와 시간』은 세계 문헌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책 중 하나다. 저자는 이 책을 온전하게 이해한 사람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같은 뛰어난 사상가도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다.


책이 출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옆구리에 『존재와 시간』을 끼고 프라이부르크를 거쳐 파리를 방문한 일본 왕세자는 프랑스 실존철학의 ‘구루’[사르트르]에게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될 책이라고 역설했다. [‘일본 왕세자’는 구키 슈조(Kuki Shuzo, 九鬼周造) 백작伯爵을 말할 것이다. 구키는 1927, 1928년 독일 마르부르크를 방문해 하이데거를 만났고, 그 뒤 프랑스에서 베르그송 아래에서 공부했다. 사르르트는 당시 구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사르트르는 독일인의 사유구조물이 이루고 있는 험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는 여기서 여러 차례 길을 잃는 실수를 범한다. 슈바르츠발트 출신의 교수에게 사르트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게 됐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 책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대표작이 될 『존재와 무』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함은 결코 그가 난삽한 문체를 갖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철학자는 사유함에 있어 기존의 언어로는 미처 기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밀고 올라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결코 사유된 적이 없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름붙이는 언어창조자의 역할을 해야 하기도 했다.


이때 하이데거는 곧잘 단순하지만 당혹스러운 물음들에서 출발하고는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있다(이다)(ist)”란 단어를 무의식적이리만큼 자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저것은 옳다(das ist richtig)” 혹은 “저것은 집이다(das ist ein Haus)” 라고 말할 때 이 “있다(이다)(ist)”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절한 해명을 붙인다. “sein(있다/이다)”란 동사에서 파생된 저 일상 언어들은 우리가, 비록 불명료하게나마, 존재를 전적으로 자명한 어떤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의문스런 어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결코 어떤 전문개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 속하는 말이다.


존재가 비록 “있다(이다)(ist)” 안에 늘 나타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감춰져 있다. 이 때문에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가 지닌 존재망각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철학자들, 또 과학자들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물음을 간과하는 대신 그만큼 더욱 분주하게 존재자, 특히 사물과 인간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과학(기술)이란 사유할 수 없고 (다만 셈하고 잴 뿐이며) 재앙을 초래할 과학, 즉 오늘날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며 겪고 있는 바와 같은 학문으로 변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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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이렇다. 세계를 탐구하여 얻을 수 있는 행운이란 고작해야 무미한 것일 따름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우리들 현존재의 “결정”과 “운명”은 모종의 기술적인 성과들(자동차, 고층빌딩, 원자로 등)에서는 알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운명적 말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물음으로써만 해석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이데거 역시 오늘날의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유일한 물음이자 삶을 결정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망각으로부터 빼내 철저한 근원성 위에 세우는 일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존재를 두고 의미를 물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현존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전제이다. 현존재 분석에서는 실존, 염려, 불안, 공포, 양심, 죽음 등의 친숙한 개념들이 새롭게 철저하게 해명돼야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스스로 선택한 엄격한 은둔생활 속에서 그렇게 했다. 그의 전화번호는 어떤 주소록에도 나와 있지 않았으며, 또한 속달편지인 경우에도 우편배달부는 초인종을 눌러서는 안 된다.


도무지 하이데거는, 이웃의 농부를 포함하여 극히 소수의 사람들과만 가깝게 지냈다. 그의 작품 때문에 저자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은 프라이부르크 뢰테부크베크 47번지에 있는 자택이든, 슈바르츠발트의 토트나우베르크에 있는 그의 오두막집이든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의 철학자가 어쩌다 자기 사유작업을 잠시 중단하는 경우가 있다면, 간혹 있게 되는 여행 때문이었다. 그는 73세의 고령이 돼서야 처음으로 그리스를 방문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뛰어난 고대 희랍의 전문가로 꼽혔다.


하이데거의 비사교성은 또한 자기 삶의 이력을 단지 짤막한 언급으로만 소개하고 그치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1889년 9월 26일 바덴에 있는, 인구 4천의 메스키르히란 마을에서, 프리드리히 하이데거와 그의 처 요하나 사이의 세 자녀들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남동생인 프리츠는 훗날 은행장이 되며, 누이동생은 어려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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